그 이야기


그 순간의 나는



제1장 찰나




1. 시작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나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하는 그다. 그저 노래를 듣고 마음에 들면 그게 그에게 좋은 음악이고, 영화를 보고 만족스러우면 그게 그에게 좋은 영화인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답하기가 어려운 그였다. 아니, 인생영화라고 부를 만큼의 작품들이 그에게 아직 없었던 걸까.

하지만 그런 질문에 몇 년 전부터 그가 답하는 영화는 “비포 트릴로지(Before Trilogy)”이다. 좋아하는 영화 하나를 뽑아내긴 힘들고, 제작 과정부터 이야기까지 인상 깊게 봤던 영화가 바로 이 영화 시리즈였던 것이다.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헤어졌던 제시와 셀린은 “비포 선셋(Before Sunset)”에서 제시가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내면서 파리의 한 서점에서 재회를 하게 된다.

언젠가 그는 그 장면을 보면서 자신의 인생 한 부분을 아름답게 간직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점점 흐려지는 기억을 잡아둘 수 있는 것은 기록이다. 더 늦기 전에, 그 추억에서 더 멀어지기 전에 어쭙잖지만 글을 써 내려가 본다.



2. 혈액형


그는 다음에 그를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던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그의 혈액형이요, 다른 하나는 그의 키였다.

한때 가까이 어울려 지내던 친구로 그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그에 대해 아는 게 많이 없다는 걸 알았다. 가령 ‘내가 이 친구를 정말 알기는 하는 걸까?’, ‘내가 이 친구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아는 거지?’와 같은 의문이 들었다.

혈액형에 대한 궁금증을 시발점으로 이런 사소한 것 하나조차 알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그는 스스로에게 ‘그럼 걔 키는 몇이지?’ 하고 물었다. 그저 눈대중으로 기억하는 그의 키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 순간 그는 그를 그리는 자신의 마음이 우스웠다. 그리고 한편으론 궁금했다. 그가 스스로의 혈액형을 알고는 있는지.

2018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만났던 네덜란드 친구와의 일이다. 문득 그 친구의 혈액형이 궁금했던 그는 그에게 혈액형을 물었고, 자신의 혈액형을 모른다는 예상치 못한 네덜란드 친구의 대답에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네 혈액형을 모를 수가 있어?”
“그걸 왜 알아야 해?”

그의 다그침에 머쓱해하던 네덜란드 친구의 답변이었다. 몸의 이상으로 병원에 가 피를 뽑지 않는 한은 잘 모른다고. 혈액형이 왜 궁금하냐고 되묻던 그 친구에게 별다른 이유 없이 가볍게 물었던 그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문화 충격이었다. 그가 나고 자란 나라에서 혈액형은 민증번호처럼 머릿속에 자연스레 박힌 개인 정보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 대화 후에  더욱더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게 바로 그의 혈액형이었다. 하지만 고작 한 달 전 그는 오랜만에 그를 만났던 자리에서 정작 이 질문이 떠오르지 않아 그 기회를 날려버렸다.
언제 다시 만난다는 기약도 없이 오랜만에 만난 그 자리에서 한다는 말이 고작 혈액형이라니. 떠오르지 않은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3. 한 여름밤의 꿈


그해 여름은 그에게 풋풋하고 아름답고 행복했지만 마음 아팠던,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런던 테이트 모던 앞의 반짝이며, 몽글몽글 날아 이내 곧 터져버리던 비눗방울 같은 순간이었던 것이다.

어느덧 6년 하고 반년이 지났다. 한때 그는 그 순간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게 무섭고 슬펐더란다.

‘지금의 기억이 왜곡되고 흐려질까’
‘그의 머릿속에서 내가 잊힐까’
‘이렇게 남보다 못한 사이가 돼버리는 건 아닐까’

과거 그 시점부터 현시점까지 선을 그어놓고 가상의 파동을 그려보면 그날에 가까울수록 그의 마음은 격정의 시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애달 필요가 없었는데 처음 겪는 감정과 상황에 그는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

(... 계속)



4. 부재


그의 부재는 예상대로 너무 크다. 이미 그는 그날부터 알고 있었다.

'단 하루도 그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있던가?'

그를 떠올리자면 그를 처음 만난 그해로 거슬러 올라가는 등반이 시작된다. 힘겹다. 그와 추억을 쌓으며 함께 오르던 그 길이 이제 그에게 아련한 고통으로 다가온다. 오르는 곳곳에 있는 그와의 기억들이 그를 괴롭히며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그의 부재가 너무 크다. 이런 부재는 그에 대한 그리움만 증폭시킬 뿐이다. 함께 기억할 수 있다면 아름다울 추억이 홀로 기억될 때 그 순간은 너무 아프다. 힘겨운 등반은 중턱에서 멈춘다. 마음 한편으로 여전히 그와의 여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언젠가 그가 말했다.

"너를 생각하면 환상인 것 같아."

이게 그가 느낀 그의 부재였을 거라 생각하니 그는 슬펐다. 점점 시간은 흐르고, 서로의 존재와 함께한 시간들은 그저 한낱 꿈으로 치부되는 걸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러한 부재가 그는 나쁘지만도 않았다. 서로 다른 곳에 있어 쉽게 만날 수 없는 그들이 진부한 연락으로 관계가 시시콜콜해져 가는 걸 보는 게 싫었다. 그는 그저 '잘 지내고 있을까?', '지금 뭐 하고 있을까?' 등 그를 그리면서도 자신의 삶을 놓지 않고 멋지게 살고 싶었다. 그의 부재는 그를 힘들게 했지만 그가 자신에게 더 집중하며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준 시간이기도 했다.

물론 그는 그의 부재가 그에게 준 영향만큼 그에게도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의 크기가 다를 테니까.



5. 가끔은


가끔 그는 자신의 글이 그에게 읽히게 되는 날이 올까 생각해본다.

‘나한테나 로맨스지, 걔는 내가 뒤에서 이렇게 생각하고 적어왔다는 거에 역시 무서워하겠지?’

이런 생각은 글을 쓰고자 하는 그를 순간 멈추게 한다.
하지만 이내 결국 자신의 감정을 글로 털어버리는 그다.

‘책으로 나오지도 않을 이런 가벼운 글을 걔한테 보이고는 싶고?’

그는 피식 웃으며 크게 숨을 뱉는다.
그래도 가끔은 훗날 그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그의 감정을 가볍게 여기는 게 아닌 공감해주는 모습을 그려본다.



제2장 그 순간의 나는




1. 바다하늘


그날 여름 그 깊이를 알지 못한 채
그 바다에 발을 담갔어

신선함과 즐거움의 물결이
밀려들어와

이내 곧
설렘으로 바뀌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풍덩

빠져버렸다.

그 바닷속을 헤매며
나는 또 얼마나 헤맸던가

한순간의 폭풍이 지나간
잔잔한 바다 위로
또 다른 바다가 높게 펼쳐져있어

갬.

밤하늘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던 그날 기억해

너와 함께.


019-12-01



2. 넌 나의


뭘까?

아직도
답이 없는
그 답을 나는 계속
생각하고 생각해본다.

솔메이트

그게 너와 나의 정의였을까

이젠 그 말조차
무색하게 느껴지는 건...

나의 사랑,
나의 뮤즈.

아마 내 마지막 그 순간까지
나는 너의 행복을 빌 거야.

to my dear special friend.


018-11-27



3. Home is


where your heart is.

Here,
I write it down in my official homeland.

However, where my heart belongs
is where Neverland adventure began.

However,
Mi amor, you are my muse.


018-11-28



4. 돌아섬


마지막 카드를 뒤집으면 한 사내가 뒤돌아서 그를 맞는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그 의미를 깨닫는다. 아니, 사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지. 일종의 확인사살이 필요했던 것 같아. 그러면 그는 그렇구나, 그렇구나, 그렇구나 하며 자신도 모르게 그 사실을 부정하려 드는 스스로를 발견하면 허탈한 웃음과 함께 쓴 눈물이 고여온다. 아직이구나.

아직도 난 그 해 그 여름에 살고 있구나.


018-11-30



5. 시작


너로 인해 시작된
모든 것.

그래서
그 순간조차
너이길 바라.

그 순간이 오면
이번엔 내가 네게
손을 내밀어...

끝을 함께 할 수 없어도
그 순간은 너와 함께.


018-11-30



6. 무제


말로 물리적으로 그 연을 끊었다 한들 정말 끊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나를 따라다니는데...


019-12-22



7. 햇살


오늘 마주한 그 햇살은
날 그때로 데려가 주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
눈을 감고
그날 그때로 돌아가 본다.


조용히 부드럽게
날 감싸 안는 따스함이
내 감은 두 눈에 입을 맞추며
안녕을 고한다.

안녕.


019-12-28



8. 원점


사실 괜찮은 게 아니었던 거다.
이렇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올 거였다면
애초에 전혀 괜찮았던 게 아닌 거다.

근데 나만 원점이다.


019-12-28



9. 구멍


처음엔 온전했고,
점점 스며들었고,
그렇게 물들었어.

계속해서 스며들어
점점 물러져버렸고,
끝내 구멍이 나버렸지.

구멍이 나기까지
점점 흐물 해지며
부드럽게 무너져가던 나는
그렇게 너에게 약해지고 있었다.


020-01-09
Mark
Copyright ⓒ Dodammm